2012년 8월 29일 수요일

체어맨, 곧 '휠체어맨'이 되리





ⓒ시사IN 이명익 8월16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부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2부 서경환 부장판사가 '법정구속'이라는 주문을 읽는 순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침통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화맨'들도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재벌 회장에 대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이라는 판결 공식이 깨질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고 한다. 그래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계속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한화 관계자는 구속 다음 날 "(구속이) 믿기지 않는다. 그룹 전체가 침통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김승연 회장도 충격이 컸던지, 판사가 퇴장하는데도 일어나지 않고 피고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임원들과 악수한 뒤 구속 피고인용 문으로 5년 3개월 만에 다시 걸어 들어갔다. 김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화 관계자는 전했다.

이번 판결을 두고 법원의 봐주기 관행을 깼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지난 2월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징역 4년 6개월, 벌금 20억원)과 어머니 이선애 전 상무(징역 4년, 벌금 20억원)의 판결과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잇따른 실형 판결을 두고 재계는 전전긍긍한다. 특히 선고를 앞둔 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 등이 속한 기업들은 이른바 경제민주화 바람의 유탄을 잇달아 맞는 것 아니냐며 몸을 움츠리는 중이다. 한화 관계자도 "대부분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이 났는데도 법정 구속을 한 것은 그런(경제민주화) 분위기가 반영된 것 아니겠느냐"라며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재계나 법조계 모두 법원의 실형 판결 효과가 항소심까지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던진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였던 한화(김승연)가 쓸 카드는 여전히 많다"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가 꼽는 카드란 유독 재벌 회장에게 관대한 구속적부심ㆍ구속집행정지ㆍ보석ㆍ형집행정지 등 법에 보장된 피고인의 권리를 말한다. 멀쩡하던 재벌 회장들은 수감만 되면 지병 등을 이유로 구치소 담장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일반인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던 권리를 손쉽게 누린 것이다. '신의 경지이고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으로 그룹 안에서 CM(Chair Man)이라 불린 김 회장도 예외는 아니다. 구속만 되면 그도 체어맨에서 '휠체어맨'으로 변신했다.

구치소에서 병원 VIP실로

김 회장의 구속은 이번까지 포함하면 세 번 째다. 1993년 11월30일 외화 밀반출 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52일 만인 1994년 1월21일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2007년 5월12일 보복폭행 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됐을 때는 그해 9월12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정상적으로 따지면 4개월 남짓, 120일가량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실제 구치소에 수감된 날수는 80일이었다. 나머지 40일은 병원 VIP실에서 보냈다. 회장님들만의 노하우 덕분이다.

가장 먼저 쓰는 카드는 구속적부심. 그해 5월25일 구속된 지 13일 만에 법원에 구속적부심을 청구했다.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6월14일에는 보석을 신청했다. 역시 기각당하고 7월2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뉴시스 최재원 SK 부회장(맨 위 왼쪽)은 관절염으로 풀려난 지 엿새 만에 자전거 사고를 냈다. 이선애 태광그룹 전 상무(맨 위 오른쪽)가 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이호진 태광그룹 전 회장(위)은 간암 수술을 이유로 풀려났다.

하지만 1심 선고 11일 뒤인 7월13일 김 회장은 재판부도 모르는 상태에서 12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치료를 위해 필요하다고 교도소장이 인정할 때 법원 허가 없이 교도소 밖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는 행형법 조항을 김 회장이 누린 것이다. 당시 김 회장은 우울증, 폐렴, 치질, 과민성 대장증후군 등의 증세를 호소했다. 당연히 특혜 논란이 일었다.

항소심 첫 공판에 휠체어를 타고 나온 김 회장은 구속집행정지 카드를 내밀었다. 결국 8월14일 김 회장은 한 달짜리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내 구치소를 나왔다. 곧바로 하루 입원비만 80여 만원이 나오는 서울대병원 특실에 입원했다. 당시 김 회장 쪽은 "섬망(사고장애ㆍ환각ㆍ착각ㆍ망상ㆍ심한 불안 등이 따르는 병적 정신상태)이 의심되며 6개월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라고 진단한 정신과 전문의를 증인으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판부에는 '빨리 석방되어 경영에 복귀해 새 사업 투자 결정을 해야 한다'며 건강 이상설과는 어긋나는 '엇박자 호소'를 하기도 했다. 서울대 병원 특실에서 치료를 받던 김 회장은 구속집행정지 기간 만료 하루 전인 2007년 9월12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명령 200시간)를 받고 풀려났다.

양형 기준에 따라 재벌 회장에 대한 판결이 엄격해졌다고는 하지만 구속된 뒤 '병실행'을 택하는 관행은 지금도 여전하다. 법원 판결 변화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던 이호진 태광그룹 전 회장이나 이선애 전 상무도 현재 구치소 밖에 있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1월21일 구속 수감되었다. 구속된 지 63일 만인 지난해 3월24일 구속집행정지가 받아들여져 구치소에서 나왔다. 간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4월5일 아산병원에서 간 절제 수술을 받았다. 이때부터 구속집행정지가 10여 차례 이상 연장되었다. 지난 2월 1심 실형 선고도 구속집행정지 기간에 받은 것이다. 그 뒤로도 연장을 거듭하던 중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 6월26일 "간 이식 수술이 시급하다"라며 이 전 회장이 낸 보석 신청을 받아들였다. 보증금 10억원을 내는 조건으로 치료를 위한 미국행도 허가했다.

최재원, 나온 지 엿새 만에 자전거 사고 내기도

어머니 이선애 전 상무는 지난 2월 법정구속되었다. 두 달 뒤인 4월20일 호흡곤란 등을 호소해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았다. 이때부터 구치소를 나온 채 지금까지 연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전 상무는 검찰 소환을 앞두고 돌연 입원했고, 검찰 출석 때는 휠체어가 아니라 아예 환자용 간이침대에 누워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 조사실에 들어와서는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조사를 받았다. 그녀가 조사받는 동안 검찰은 '재벌 오너와 휠체어'라는 제목의 외신 기사를 기자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간이침대 출석이 연출이라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횡령 등 혐의로 최태원 SK 회장과 함께 기소된 동생 최재원 수석 부회장도 지난 6월1일 보증금 2억원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 선고 때까지 구속 기한이 최대 6개월을 넘지 않아야 하는데 기간 만료를 앞둔 시점인 데다 "지병인 류머티즘관절염이 심해져 치료가 필요하다"라는 사유가 받아들여졌다. 그는 목발을 짚고 법정에 출석해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런 최 부회장은 풀려난 지 엿새 만에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다 시민을 치어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이런 회장들의 전례와 관행에 비춰보면, 김승연 회장 역시 다음 단계로 보석ㆍ구속집행정지 카드를 쓸 가능성이 높다. 한화그룹에서는 벌써부터 김 회장의 건강이상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한화 관계자는 "이라크 출장 과정에서 연일 강행군을 해서 전반적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고제규 기자 unjusa@sisain.co.kr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