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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도 존경받는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07년 이후 부자학연구학회 활동을 하면서 부자들을 만나다 보니 어언 1000명 가깝게 됐다. 연구 목적 등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존경받는 부자다. 이들의 재산 규모는 수십억원에서 수천억원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점점 많은 부자가 이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데 눈을 뜨기 시작한 듯하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한국 부자, 아직 멀었다
얼마 전 자수성가한 80대 원로 실업가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늘 하던 대로 원론적인 답변을 했다.
“좀 더 깨끗한 방법으로 부를 쌓으려고 노력하세요.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회공헌과 봉사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 부자 중 생각보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다.
“정말 쉽지 않겠지만 노력할게요. 죽은 뒤에도 100년 동안 욕먹지 않는 부자가문으로 남을 수 있게 가르침을 주세요.”
사실 기본적인 것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부자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금융권에선 통상 재산 30억원 이상을 부자라고 하고, 그 잣대는 나라마다 전문가마다 다르다. 그래도 부자학연구학회에서 가다듬은 정의를 보자. 정신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물질적으로 그 일을 통해 여유를 만들고, 그 잉여물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부자 계층(Affluent Class)이란 개념도 만들어 부자를 세 단계로 나눴다. ▶총체적 계층(Holistic Class) ▶성숙 부분 계층(Mature Partial Class) ▶하위 부분 계층(Lower Partial Class)이다. 총체적 계층은 가장 높은 경지로, 정신·물질·사회 세 가지 여건을 다 충족하는 부류다. 인류 역사상 100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세 가지 중에서 둘을 충족하면 성숙 부분 계층이다. 1200만 명쯤인 지구촌 부자 중 10% 정도로 추정된다. 하위 부분 계층은 어느 한 가지만 충족한 부자다. 극단적인 경우를 들면 가진 건 많은데 주변에서 욕먹고, 자기 존재를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이른바 졸부다.
사후 100년 동안 세상 존경을 받는 부자가문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조언은 해줄 수 있겠다. 이 역시 뻔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부자가 되려는 목
적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빈곤국을 병마에서 구하려고’ ‘무지한 이웃에게 배움의 등불을 비추려고’ ‘지구환경을 살리려고’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다. 나와 일족들의 부귀영화뿐 아니라 내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확고한 부자철학이 있어야 한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강조하는 인도 자이나교 신도들은 재물을 모으는 목적 자체가 남을 돕기 위함이다. 가문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면 시쳇말로 가문의 브랜드화가 가능하다. 사업과 부를 일으킨 창업자는 가문의 영예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일체화를 지향해야 한다.
필자는 우리나라 경향 각지의 부자들을 면담하면서 나름의 기준에 따라 그들이 자주 쓰는 단어와 표현을 조합하고 분석해 부자 등급을 매기는 작업을 해왔다. 이런 분석 기준은 나름대로 평판이 좋은 부자들과 함께 체계화했다. 안타깝게도 100년 부자가문이 될 듯 싶은 부자, 아니 당장이라도 독창적 부자철학을 제시하는 부자는 거의 없었다.
“사장님, 회장님의 생각을 A4 용지 한 쪽에 요약해 1000번쯤 읽으면서 다듬고 고쳐보세요. 훌륭한 가문 헌장, 가훈이 될 겁니다.”
헛나간 정신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축재하고 ‘나 이제 여유가 생겨 좀 퍼줄 테니 다들 박수 쳐 주세요’ 하는 속마음은 곤란하다.
내가 만난 부자 중 사회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활동을 하지만 과거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쌓은 경우가 적잖았다. 사실 성인군자가 돈을 벌기는 쉽지 않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 세계 역사가 정도 차이만 있지 그러했다. 지구상 부자가 많이 몰려 사는 4대 권역 유럽·북미·동북아·중동 네 곳을 다 봐도 그랬다.
사이비 사회공헌의 집단 최면 경계를
부자학연구학회는 수년 전부터 귀감이 될 만한 부자를 선정해 해마다 봉사부자상을 시상해 왔다. 그런데 한 번은 심사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선행은 두드러지는데 부의 형성 과정이 미심쩍은 경우였다. 그때 한 심사위원의 말. “깨끗하게만 돈 번 사람이 어디 흔합니까. 그러다 상 줄 사람 못 찾습니다.” 장관 청문회에서 이런저런 의혹으로 낙마하는 경우를 보면서 ‘학군 편법 전입이나 부동산 투기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되돌아보는 사람이 많다. 장관 청문회가 아니라 부자 청문회가 있다면 온전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려받은 것 없는 젊은 부부가 맨손으로 수십 년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주일에 100시간 가까이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은 최고 8억원 정도다. 부자학회에서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한 끝에 나온 수치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의 출발선이 부모의 빈부격차에 따라가 너무 다르다. 이런 점에 젊은이들은 절망한다.
세상을 위한다는 말만큼 그럴싸한 말이 없다. 하지만 실제 그 일을 한다는 사람들 중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나라에는 크고 작은 수천 개의 복지·장학재단이 있다. 하지만 설립 목적이 진정 사회를 위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곳이 너무 많다. 선의라는 포장의 이면에 절세나 경영권 강화 목적이 얼마나 스며있는지 부자들은 자문해봐야 한다. 복지·장학재단의 실질적 운영자를 일반에 공모해 구하면 어떨까.
사회봉사를 지향하는 부자들의 모임도 진정성을 좀 더 강화했으면 좋겠다. 부자학회장이라니까 수백 곳의 부자 모임에서 초청을 받아 가봤다. 전국에 이러한 부자 모임이 1만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웬만한 모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호텔에서 열리는 조찬·오찬·만찬 모임에 가 보면 남루한 차림새의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사이비 진실성 효과(Pseudo-Truth Effect)’라는 집단 최면을 경계해야 한다. 탐욕을 감추거나 죄의식을 덜기 위해 반복적으로 좋은 일을 언급하고 그런 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봉사일꾼이라고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천국에 500년 먼저 간다”는 이슬람교 가르침을 마음에 담으면 족하다.
부자학회가 만든 개념 중 ‘선악후선설(先惡後善說)’이라는 것이 있다. 부의 축적 과정이 잘못된 사람도 나중에 선행을 통해 어느 정도 이를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그릇된 방식을 일삼은 뒤 몇 차례 봉사활동으로 잘못을 100% 사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해외 연구소 중에는 2050년께면 한국의 국력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곳이 많다. 자랑스러운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울러 세계적 부자, 브랜드가 있는 부자가 즐비하길 기원한다. 유튜브를 휩쓰는 한류의 창조성을 부자들이 습득했으면 좋겠다. 세계가 한국 부자에 열광할 수 있게 ‘강남 스타일’을 만들어 보자.
한동철(54) 서울대 경영학과와 미국 세인트루이스대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현대경제연구원을 거쳐 1995년부터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부자학연구학회 창립을 꿈꾸고 있다.
한동철 부자학연구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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